‘가상 아이돌’과 ‘가상+현실 아이돌’은 기술로 신체를 재현하려는 오랜 시도의 산물이다. 디지털 정보와 데이터가 현실의 신체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에 침투해 새로운 신체를 만들고 가상세계에 살게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현실 아이돌과의 관계 속에서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을까?
① 아담, 시유 등의 ‘가상 아이돌’은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활동하는 아이돌과 달리,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성된 신체만 있고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강신규, 2020). 현실에 실존하는 인물들의 아바타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존재이기는 하나, 현실 속 인물들에 대한 고려 하에 재현됐
다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아담은 탤런트 겸 배우 원빈의 닮은꼴로 유명했다. 즉, 현실의 인물과 가상의 아이돌 간 명징한 존재론적 관계는 없지만, 가상의 아이돌을 현실의 인물들을 경유해 재현한 이상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공간에 마련된 로봇인 셈이다. 신체가 기계로 현
실세계에 존재하는 대신, 가상세계에서 디지털 정보와 데이터의 집합체로서 보여질 뿐이다.
② K/DA, 에스파, 이터니티 등의 ‘가상+현실 아이돌’은 현실 너머에만 존재하는 가상 아이돌과 달리, 가상을 현실과의 연계 속에 두거나(K/DA) 현실 위에 덧씌움(에스파, 이터니티)으로써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우거나 희미하게 만든다. 둘 사이에는 가상과 현실 모두에 연결된다는 공통점뿐 아니라,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②-① K/DA는 이미 <리그 오브 레전드>를 통해 알려진 캐릭터들에 실제 아이돌과 가수들을 접합한 시도이다. 엄연히 둘(캐릭터 vs. 실제 아이돌/가수)은 다른 존재이고, ‘K/DA’라는 프로젝트 하에서만 상호연결될 뿐이다. 팬들 역시 이미 세계관과 인지도를 동시에 지니는 <리그 오브 레전드> 캐릭터 팬, 직접 노래를 부른 아이돌/가수들의 팬, 그리고 K/DA 팬으로 구분 혹은 중첩된다.
물론 ‘K/DA’ 프로젝트를 위해 캐릭터와 실제 아이돌/가수 양쪽이 별도의 설정작업을 거치기는 했다. 가령 K/DA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 출시된 스킨(게임 내 캐릭터 외형을 바꾸는 아이템) 이름으로, 이 스킨을 통해 캐릭터들은 가수로 변신할 수 있다. 리드보컬, 리드댄서, 래퍼와 같이
한국 아이돌 그룹 특유의 멤버구성 규칙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멤버마다 아이돌 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맥락도 입혔다. 한편, 캐릭터들이 공연할 때 움직임은 게임이 아닌 실제 아이돌/가수의 움직임에서 가져왔다. 아이돌/가수의 일부 안무동작을 모션캡처(motion capture)를 통해 캐릭터에 입힌 것이다. 모션캡처는 가상의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을 줄이고 인간다움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특기할 점은, 가상과 현실에서 각각 별도로 활동하던 존재가,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을 통해 실제 무대에서 하나(가상+현실)가 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증강현실은 현실세계에 가상의 대상물을 구현함으로써 실재(reality)를 대체(replacement)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supplement)한다(Azuma, 1997). 덕분에 가상 캐릭터와 현실 아이돌/가수들이 함께 등장해 공연을 펼치는 일이 가능해진다.
가상의 대상물이 현실세계에 배치됨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결합하고, 둘이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한다. 게임 캐릭터의 세계관과 인지도, 실제 아이돌/가수의 활동이력과 인지도는, 제3의 프로젝트가 만든 설정 및 실감기술(모션캡처, 증강현실)과 만나 ‘활동 시·공간의 일치’를 만들어낸다. 합동공연을 통해 캐릭터와 아이돌/가수의 각기 달랐던 활동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된다. 아이돌/가수뿐 아니라 캐릭터가 움직이는 공간도 지금 여기(현실)다.
따라서 이들의 공연은 이용자에게 가상에 대한 원격현전(tele-presence)감만을 제공했던 가상 아이돌과 달리, 현전(presence)감을 제공한다.
②-② 에스파는 현실세계에 사는 멤버들과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아바타인 ‘아이(ae)’가 소통하고 교감하며 성장해간다는 세계관을 취한다. 아이는 인간의 정보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든 가상세계 속 또 하나의 자신이다. K/DA에서 각기 다른 활동을 펼치는 게임 캐릭터와 아이돌/가수가 임시적으로 결합했다면, 에스파에서는 가상의 아이와 현실 멤버가 명징하게 존재론적 관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이는 가상세계에 사는 도플갱어(doppelgänger)와도 같다. 아바타 아이-카리나는 실제 사람인 리더 카리나에서 비롯된 가상의 존재지만, 인공지능을 지녀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별개의 유기체다. 따라서 현실세계 멤버들은 기존 현실 아이돌들처럼 오프라인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친다. 그와 동시에 가상세계 멤버들도 다양한 콘텐츠와 프로모션을 통해 자신들을 알린다. 즉, 둘은 온·오프라인에서 때로는 각자, 또 때로는 함께 활동한다. 에스파에 있어 인공지능은 실제 기술을 그들 자신이나 활동에 접목한 것이 아니라 재현 속 설정일 뿐이다(강신규, 2021).
이터니티의 경우, 인간과의 소통으로 존재하고 성장한다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지구와 평행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행성 아이아(AIA)에서 사는 아이안(AIAN)들은 어느 날 아이아의 에너지원인 붉은꽃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행복하고 찬란하던 일상을 잃게 된다. 아이안들은 붉은꽃을 다시 피을 수 있는 해결책이 지구에 존재하는 사랑임을 알게 되고, 이터니티라는 걸그룹의 모습으로 지구에서 지구인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여정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에스파가 현실의 인물을 토대로 가상의 캐릭터로 만들어 함께 활동시킨다면, 이터니티 역시 현실 인물로 가상 캐릭터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현실 인물이 가상 캐릭터를 위한 재현적 토대만을 제공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