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이슈 & 트렌드 58호(9+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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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미디어 현재와 미래

테크놀로지로 확장된
<정이>의 세계

정황수(더만타스토리 VFX 슈퍼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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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으로 콘텐츠 제작 규모와 예산이 커지면서 새로운 기술의 시도 또한 가능해졌다. 연상호 감독의 K-SF 영화이자 넓은 의미의 실감미디어인 <정이>는 그 한 사례로, 한국 영화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다양한 요소가 도입된 컨텐츠다. <반도>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프리 프리-프로덕션 공정은 산업적으로 효율적인 컨텐츠 제작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창의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시들을 통해 논한다. 기술과 콘텐츠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콘텐츠이며, 기술과 콘텐츠가 어떻게 함께 발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앞으로 남겨진 숙제이다.

1. 실감미디어와 OTT

실감미디어에 대해 논하기 전에 실감 기술이란 무엇인가 우선 정의할 필요가 있다. 실감 기술은 좁은 의미의 실감 기술과 넓은 의미의 실감 기술로 나뉜다. 좁은 의미의 실감 기술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아우르는 확장현실(Extended Reality)을 뜻하며, 이를 XR이라 부른다. 넓은 의미의 실감 기술은 가상 환경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면서 실재감과 몰입감을 전달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아우른다. 여기서는 넓은 의미의 실감 기술의 정의를 따라, 종래의 미디어보다 몰입도 높은 경험을 전달하는 디지털 컨텐츠로 실감미디어를 정의하고자 한다.

연상호 감독이 글로벌 OTT인 넷플릭스와 함께 제작한 <정이>는 실감미디어의 한 사례로 제시할 만하다. <정이>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는 넓은 의미의 실감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이>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우가 실제 촬영해 만들어진 '인간 정이'와 VFX 기술을 통해 처음부터 디지털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정이'가 공존한다. 이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이질감 없는 융합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그림1 좌) 김현주 배우 Full Body 3D 스캔 장면 / 우) 기계 정이 컨셉 이미지
좌) 김현주 배우 Full Body 3D 스캔 장면 / 우) 기계 정이 컨셉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이런 <정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가 있다. 종래의 극장 기반 영화 시장에서는 시장의 규모에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이 중요한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가 국내에 상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제작 규모와 예산이 커지고, 새로운 기술적 시도를 할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정이>나 <승리호>와 같은 작품들이 현실과 완전히 다른 미래 세계를 그리는 데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여기에 있다.

2. K-SF로서 <정이>

<정이>가 보여준 뇌 복제와 인공지능, 아포칼립스 이후에 도래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 로봇들 간의 전투 장면과 같은 요소들은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던 요소들이라는 데서 <정이>가 얼마나 도전적인 작품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정이>에 대해 논하기 앞서, '연상호 유니버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부터 꾸준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장해 나갔다. <부산행>이 'K-좀비물'이라는 장르에 도전했다면, 다음 작품인 <염력>에서는 'K-히어로물'이라는 장르에 도전했다. <부산행>의 속편으로 기획된 <반도>에서도 'K-좀비물'이라는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하게 'K-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란 장르에 도전했으며, <지옥>에서는 'K-오컬트' 혹은 'K-코즈믹 호러' 장르에 도전했다. <정이> 또한 이런 도전의 일환으로, 'K-SF'라는 장르에 도전한 작품이다.

K-SF라는 장르답게 <정이>에는 장면 전체가 CG로 이루어진 풀 CG(Full Computer Graphic) 장면이 많이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영화가 실사 장면을 촬영한 뒤, 해당 실사 장면에 CG를 덧입히는 식으로 작업된다면 풀 CG 장면의 경우에는 실사를 촬영하기 전에 사전 제작을 통해 장면을 설계한다. 이렇게 설계된 장면을 바탕으로 합성에 필요한 인물 촬영을 진행하게 되는 식이다. 이런 풀 CG 장면과 같이 VFX 작업에서 난도가 높은 장면들이 늘어남에 따라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이전 단계에서부터 준비해야 할 것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정이>처럼 VFX의 중요도가 높은 영화에서는 프리-프리-프로덕션(Pre-Pre-Production)이라는 공정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림2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공간별 키 비주얼 컨셉 이미지들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공간별 키 비주얼 컨셉 이미지들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3. 프리-프리-프로덕션

프리-프리-프로덕션이란 연상호 감독의 영화 <반도>에서 처음 도입된 영화 제작 공정이다. 전통적인 영화에서는 최종 시나리오가 나올 때부터 본격적인 프리-프로덕션 공정이 시작된다. 프리-프리-프로덕션은 최종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부터 세계관의 컨셉과 캐릭터 디자인 등, 연출자가 구상하는 이미지들을 시각화하는 공정이다. 이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초기 리소스를 줄이고 시간과 제작비를 절감해 효율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의가 있다. 프리-프리-프로덕션 공정의 의의는 산업적인 효율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연출자나 작가가 잠재적인 기술적 제약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여 더욱 창조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정이>는 프리-프리-프로덕션과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만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SF라는 장르 특성상 앞서 언급한 풀 CG 장면을 포함해 난도 높은 VFX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프리-프로덕션 공정을 도입한 덕분에 더욱더 효율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작업이 가능해졌다.

4. 캐릭터 '정이'의 구현

<정이>에 등장하는 정이는 '인간 정이'와 '안드로이드 정이'로 나뉜다. 인간 정이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으로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카메라로 촬영한 반면 안드로이드 정이는 디지털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설계 및 구현되었다. 인간 정이와 안드로이드 정이가 서로 이질감 없이 연결되는 것이 중요했는데, 다시 말해서 리얼리티 측면에서 차이가 없어야 했다. 이를 위해 초기 컨셉을 구축하는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의상, 분장, 특수효과 팀이 안드로이드 정이를 함께 만들어 나갔다.

그림3 안드로이드 정이의 감정 표현을 위한 컨셉 제안 이미지
안드로이드 정이의 감정 표현을 위한 컨셉 제안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그림4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작업된 안드로이드 정이 컨셉 이미지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작업된 안드로이드 정이 컨셉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가 창조적인 도움이 된 사례가 있다. 안드로이드 정이는 기계 로봇인 만큼 사람과 달리 감정을 표현할 수단이 없다. 인간은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기계 로봇은 표정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드로이드 정이가 인간처럼 감정을 표현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숙제가 주어졌고, 결국 디자인 단계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눈썹만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림5 컨셉을 바탕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정이 3D 이미지
컨셉을 바탕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정이 3D 이미지

출처: 좌)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 우) 덱스터 스튜디오

5. <정이>의 세계 속 공간의 구현

안드로이드 정이처럼, <정이>에 등장하는 상당수 공간은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와 함께 개발되었다. SF 장르의 특성상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설정하는 과정이 중요했고, 그것이 공간을 통해 구현되어야 했다. 이에 연상호 감독과 연출팀에서는 러프한 지도를 만들어 제공했고, 이를 토대로 공간의 동선과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여러 공간의 컨셉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그림6 <정이> 주요 공간 로드맵
<정이> 주요 공간 로드맵

출처: 클라이막스 스튜디오 연출팀

<정이> 제작 초기만 하더라도 이렇게 구상된 공간들이 풀 CG로 구현될 예정이었지만 제작 여건과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풀 CG로만 구현된 공간과 전통적인 VFX 방식대로 부분적인 미술 세팅을 CG로 연장하여 촬영하는 방식을 혼용하게 되었다. 안드로이드 정이와 마찬가지로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가 공간의 컨셉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다.

그림7 물에 잠긴 도시 키 비주얼 컨셉 이미지
물에 잠긴 도시 키 비주얼 컨셉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정이가 전투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 테스트룸은 각본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풀 CG로 제작된 가상 시뮬레이션 공간이라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공간의 컨셉을 구축하는 단계에서 정이가 XR 기술을 활용해 실제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받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이것이 각본에 반영되었다. 인간 정이와 안드로이드 정이의 사례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이질감 없이 봉합되어야 하는 장면이 된 것인데, 이를 위해서 시뮬레이션이 종료되고 모듈 형태의 스틱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테스트룸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사전부터 철저하게 계획하여 촬영이 이루어졌다.

그림8 메타버스 테스트룸 공간 디자인 이미지
메타버스 테스트룸 공간 디자인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3D팀

그림9 메타버스 테스트룸 촬영 원본 플레이트 이미지
메타버스 테스트룸 촬영 원본 플레이트 이미지

출처: 클라이막스 스튜디오

그림10 메타버스 테스트룸이 가합성된 이미지
메타버스 테스트룸이 가합성된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3D팀

6. <정이>가 남긴 의의와 숙제

이렇듯 <정이>는 프리-프리-프로덕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영상 기술을 포함한 여러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콘텐츠와 기술은 점점 더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종래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장면들을 구현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창의력이 제한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그것이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것인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구상에는 기술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프리-프리-프로덕션이라는 공정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여느 작품이 그렇듯 <정이>도 여러 기술적 한계에 직면했다. 일례로 풀 CG로 구상된 장면이 일정과 퀄리티 문제 및 현실적인 이유로 축소된 경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해체되는 시퀀스다. 인공지능 로봇으로서 정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과정이 담긴 시퀀스였기 때문에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공을 들여 풀 CG로 기획된 장면이었지만 일정과 퀄리티의 문제로 축소, 종래의 방식대로 촬영되어 기술적 아쉬움을 남겼다.

그림11 최종 편집 단계에서 오밋(삭제)된 장면의 초기 키 비주얼 이미지
최종 편집 단계에서 오밋(삭제)된 장면의 초기 키 비주얼 이미지

출처: 엔진 비주얼 웨이브 컨셉팀

아무리 기술이 좋더라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콘텐츠가 기반이 되지 않으면 기술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정이> 또한 CG와 같은 디지털 VFX 기술이 작품 속 드라마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는데 이는 결국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기반이 되었다. 콘텐츠와 기술이 함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정이>가 K-VFX에 남긴 숙제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